제2차 와카쓰키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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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은 1931년 4월 14일부터 12월 13일까지 244일 동안 재임한 일본의 내각이다.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총리대신을 맡았으며,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 등이 주요 각료로 참여했다. 주요 정책으로는 이노우에 준노스케의 재정 정책과 시데하라 기주로의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만주 사변 발발과 10월 사건 등으로 인해 내각은 위기에 직면했다. 만주 사변에 대한 불확대 방침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의 독단적인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반란과 내각 내 불일치로 인해 1931년 12월 11일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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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와카쓰키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제2차 와카쓰키 내각 |
원어 이름 | 第2次若槻内閣 (일본어) |
내각 번호 | 28대 |
총리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총리 임기 | 귀족원, 입헌민정당 총재 |
천황 | 쇼와 |
내각 구성 시기 | |
성립일 | 1931년 4월 14일 |
종료일 | 1931년 12월 13일 |
전임 내각 | 하마구치 내각 |
후임 내각 | 이누카이 내각 |
정치 정보 | |
정치 세력 | 중의원 블록: |border=darkgray}} 입헌민정당 귀족원 블록: 겐큐카이 고세이카이 도와카이 도세이카이 |
여당 | 입헌민정당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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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단 | 공식 명단 (일본어) |
2. 재직 기간
1931년 (쇼와 6년) 4월 14일 ~ 1931년 (쇼와 6년) 12월 13일[1]
3. 내각의 구성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은 입헌민정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직책으로는 내각총리대신 와카쓰키 레이지로,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 내무대신 아다치 겐조, 대장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 해군대신 아보 기요카즈 등이 임명되었다.[1]
그 외 사법대신 와타나베 지후유, 문부대신 다나카 류조, 농림대신 마치다 주지, 상공대신 사쿠라우치 유키오, 체신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가 임명되었다. 철도대신은 에키 타스쿠에서 하라 슈지로로, 척무대신은 하라 슈지로에서 와카쓰키 레이지로로 교체되었다. 내각서기관장은 가와사키 다쿠키치, 법제국장관은 다케우치 사쿠헤이에서 사이토 다카오로 교체되었다.[1]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대부분 입헌민정당 소속으로, 1931년 4월 15일에 임명되었다.[1]
다음은 각료, 정무차관, 참여관의 출신 정당별 분포이다.
3. 1. 국무대신
직위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내각총리대신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외무대신 | 시데하라 기주로 | 무소속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내무대신 | 아다치 겐조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대장대신 | 이노우에 준노스케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육군대신 | 미나미 지로 | 육군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해군대신 | 아보 기요카즈 | 해군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사법대신 | 와타나베 지후유 | 무소속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문부대신 | 다나카 류조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농림대신 | 마치다 주지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상공대신 | 사쿠라우치 유키오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체신대신 | 고이즈미 마타지로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철도대신 | 에기 다스쿠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9월 10일 |
하라 슈지로 | 입헌민정당 | 1931년 9월 10일 | 1931년 12월 13일 | |
척무대신 | 하라 슈지로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9월 10일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입헌민정당 | 1931년 9월 10일 | 1931년 12월 13일 | |
내각서기관장 | 가와사키 다쿠키치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 |
법제국장관 | 다케우치 사쿠헤이 | 입헌민정당 | 1931년 4월 14일 | 1931년 11월 8일 |
사이토 다카오 | 입헌민정당 | 1931년 11월 9일 | 1931년 12월 13일 |
3. 2. 정무차관 및 참여관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1931년(쇼와 6년) 4월 15일에 임명되었다.[5]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외무 정무차관 | 야부키 쇼조 | 귀족원/무소속(공정회)/남작 | |
내무 정무차관 | 후루야 요시타카 | 중의원/입헌민정당 | |
대장 정무차관 | 다다 마사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육군 정무차관 | 이토 지로마루 | 귀족원/무소속(연구회)/자작 | 유임 |
해군 정무차관 | 마키야마 고조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사법 정무차관 | 야나미 타케지 | 중의원/입헌민정당 | |
문부 정무차관 | 요코야마 킨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농림 정무차관 | 니시무라 단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상공 정무차관 | 마츠무라 기이치 | 귀족원/무소속(공정회) | |
체신 정무차관 | 고이케 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철도 정무차관 | 스에마츠 카이이치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탁무 정무차관 | 무라사키 야스시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외무 참여관 | 다나카 다케오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내무 참여관 | 고야타니 조조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대장 참여관 | 마에다 후사노스케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육군 참여관 | 히사 쇼헤이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해군 참여관 | 나베시마 나오쓰라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자작 | |
사법 참여관 | 도자와 민주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문부 참여관 | 구도 데쓰오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농림 참여관 | 오카모토 지쓰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상공 참여관 | 사쿠라이 헤이고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체신 참여관 | 히라카와 마쓰타로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철도 참여관 | 나카지마 야단지 | 중의원/ 입헌민정당 | |
탁무 참여관 | 스기우라 다케오 | 중의원/ 입헌민정당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의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대부분 입헌민정당 소속이었다.
4. 주요 정책 및 사건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우익 자객에게 저격당한 이후 병세 악화로 하마구치 내각이 사퇴하고, 후임 총리이자 민정당 총재로 지명된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내각을 구성하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 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으며, 나카무라 대위 사건과 만보산 사건 등으로 국민들의 대중(對中) 감정이 악화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 일각에서는 '만몽(滿蒙)의 위기'를 강조하며 만주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국가 개조'를 명분으로 황도파 군사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와카쓰키 내각은 만주사변에 대해 불확대 방침을 천명했지만, 조선군이 독단으로 월경하고, 의회가 이를 추인하면서 사태가 확대되었다. 와카쓰키 총리는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제안으로 거국 연립내각을 조직하려 했으나, 각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아다치 내상이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이노우에 재정''': 하마구치 내각에서 유임된 이노우에 준노스케 재무대신 하에서 긴축 재정 정책이 지속되었지만,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디플레이션과 불황이 계속되었다.
- '''시데하라 외교''':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 하에서 대중국 유화 정책이 지속되었으나, 나카무라 대위 사건과 만보산 사건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반중 감정이 악화되면서 한계에 직면했다.
- '''만주사변''':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이시하라 간지 작전 참모 주도로 남만주철도를 폭파한 유조호 사건을 계기로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와카쓰키 내각은 불확대 방침을 내세웠지만,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가 독단으로 월경, 와카쓰키 총리는 결국 이를 사후 승인하였다.[6]
- '''10월 사건''': 만주사변 와중에 육군 내에서 국가사회주의에 기반한 사회 혁신을 일으키려는 쿠데타 모의가 발생했다. 쿠데타는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검거되었지만, 이후에도 군 내부 및 재야에서 쿠데타와 테러를 용인하는 사상이 남아 2·26 사건까지 유사한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와카쓰키 내각은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반란"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붕괴되었다. 와카쓰키 총리는 관동군과 국제 여론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권 운영에 어려움을 겪자, 아다치 내무대신에게 정권 타개를 위한 정우회와의 대연립 정권 ("협력 내각") 구성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시데하라 외상과 이노우에 준노스케 재상은 이에 반대했고, 와카쓰키 총리는 아다치 내상에게 협력 내각 계획 중지를 전달했다.[7]
하지만 와카쓰키 총리가 중신들과 상담을 거듭하면서 정권은 안정을 잃었고, 아다치 내상을 필두로 차기 정권을 노리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1월 8일에는 아다치 내상이 협력 내각 수립 담화를, 21일에는 성명을 발표하며 공개적으로 움직였다.[7]
와카쓰키 총리는 협력 내각을 철회하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12월 10일 아다치 내상 측근과 정우회 간사장이 "협력 내각" 수립 각서를 교환하고, 와카쓰키 총리에게 전달했다. 같은 날 각의에서 와카쓰키 총리가 아다치 내상을 추궁했지만 결렬되었고, 아다치 내상은 각의 출석을 거부하며 각내 불일치가 발생했다.[7] 당시 총리에게는 각료 파면권이 없었기 때문에, 내각은 총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4. 1. 대외 정책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우익 자객에게 저격당한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퇴하자, 후임 총리이자 민정당 총재였던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내각을 조직하였다. 외교 방면에서는 중국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일본의 만주 권익을 반환하도록 요구하면서 나카무라 대위 사건과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여 국민들의 반중 감정이 거세졌다. 시데하라 외교의 유화 노선에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6] 육군 일각을 중심으로 '만몽(滿蒙)의 위기'가 강조되어 여론에 호소하면서 만주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기운이 높아져 갔다.[6]1931년 9월 18일, 유조호 사건을 시점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하였다. 육군의 응급 파병이 검토되었지만,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는 관동군 증원을 제의하지 못하고 사태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다.[6] 그럼에도 조선군은 본국 정부의 방침을 거스르면서 독단으로 조만(朝滿) 국경을 넘었고, 의회가 예산을 승인하면서 만주 사변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7]
4. 1. 1. 시데하라 외교의 한계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주도한 대중국 유화 정책은 나카무라 대위 사건, 만보산 사건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대중(對中) 감정이 악화되면서 한계에 직면했다.[6] 육군 일각에서는 '만몽(滿蒙)의 위기'를 강조하며 만주 문제의 무력 해결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6]4. 1. 2. 만주사변 발발
1931년 9월 18일, 유조호 사건을 시작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 육군의 파병이 검토되었지만, 다음 날인 19일 국무회의에서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는 관동군 증원을 제의하지 못하고 사태를 확대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결정했다.[6] 그러나 조선군이 본국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국경을 넘었다. 의회가 예산을 승인하면서 만주 사변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7] 이후 와카쓰키 내각은 국제연맹에 관동군을 점차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일본이 현지 정세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는 여론을 만들고자 했다.4. 2. 국내 정책
하마구치 오사치가 우익 자객에게 저격당한 이후 병세 악화로 하마구치 내각이 사퇴하고, 후임 총리이자 민정당 총재로 지명된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내각을 구성하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 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으며, 나카무라 대위 사건과 만보산 사건 등으로 국민들의 대중(對中) 감정이 악화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 일각에서는 '만몽(滿蒙)의 위기'를 강조하며 만주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국가 개조'를 명분으로 황도파 군사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기도 하였다.4. 2. 1. 경제 위기 심화
하마구치 오사치가 우익 자객에게 저격당한 이후 병세 악화로 하마구치 내각이 사퇴하고, 후임 총리이자 민정당 총재로 지명된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내각을 구성하였다. 내정면에선 세계 공황의 여파에 따른 세입 감소를 모면하고자 행정 및 재정 정리가 시급하다고 판단, 그 시작으로 관리 감봉령이 실시되었고, 군제 개혁안을 통한 추가 군축도 모색했으나, 금 해금(金解禁) 이후로 생사(生絲)의 가격과 쌀값이 폭락해 실업자가 대량으로 속출하는 동시에 중소 기업과 농촌이 궁핍해졌다.[1]4. 2. 2. 10월 사건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우익 자객에게 저격당한 후 병세가 악화되어 하마구치 내각이 사퇴하고, 후임 총리이자 민정당 총재로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지명되어 조각(組閣)하였다. '국가 개조' 명분을 내걸며 황도파 군사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 모의가 발각된 10월 사건은 정계 상층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1]5. 내각의 붕괴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우익 자객에게 저격당한 후 병세가 악화되어 하마구치 내각이 사퇴하고, 후임 총리이자 민정당 총재로 지명된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내각을 구성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유조호 사건을 시점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하였다. 육군의 응급 파병이 검토되었지만, 다음 날인 19일 오전 10시의 국무회의에서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는 관동군 증원을 제의하지 못한 채 사태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본국 정부의 방침을 어기면서 독단으로 조만(朝滿) 국경을 넘어갔다. 의회가 예산을 승인하면서 만주 사변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와카쓰키 총리는 내무대신 아다치 겐조의 제안으로 영국처럼 군부를 억제할 수 있는 거국 연립내각을 조직하고자 야당 정우회와의 연정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러나 각료들이 거국 내각 구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총리는 이를 단념하려 했지만, 아다치 내무대신이 '초지일관하지 못하다'며 항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다치는 사임을 요구받았음에도 거절하였다. 일본제국 헌법하에서 총리대신에겐 각료 파면권이 없었으므로,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econd Wakatsuk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昭和6年4月14日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昭和6年9月10日
[4]
간행물
『官報』第1460号「叙任及辞令」「彙報」、昭和6年11月10日
[5]
간행물
『官報』第1286号「叙任及辞令」、昭和6年4月16日
[6]
문서
関東軍の指揮権は本来、大元帥である天皇を輔弼(命令に伴って生じる結果責任を天皇にかわって負うことを法的に義務付けられること)する形で関東軍司令官が有しているが、この時は金谷参謀総長の要望によって一時的に天皇から参謀総長に委任され、参謀総長から関東軍に命令が下された。
[7]
문서
加藤内閣は憲政会と政友会の連立内閣であったが、政友会が野党政友本党と野合して多数派工作を行い、閣内不一致による総辞職、政権奪取を目論んだ。しかしこの時は、選挙による民意を無視した政治的野望に基づいた造反であったことから、西園寺公望元老はこれを認めずに、政友会を排除する形で加藤内閣は継続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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